Untitled

고장 난 핸드폰 카메라, 충전되지 않은 에어팟, 밑줄 선 하나에 동그란 잉크 똥을 싸는 펜. 이것은 따뜻한 햇볕과 달콤한 바람이 부는 평범한 봄날을 만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기에 도리어 나는 행복하다. 나는 어디서 채석되는지 모를 호상 편마암 위에 앉았다. 보기 좋은 모양새를 한 페인트를 잔뜩 바른 나무 의자보다는, 폴짝 뛰어올라 겨우 엉덩이 한쪽을 걸터앉을 수 있는 이 암석 위가 편안하다. 나는 겨우 봄 위에 앉아 책을 읽는다. ‘새싹 정류장’에 아이들을 태운 커다란 노란 버스가 정차하는 시간이 되면 나는 책 읽는 일을 멈춘다. 얼마 전 새로 페인트를 칠하느라 놀이터는 한동안 놀이 금지구역이 되었다. 페인트가 마를 때까지 놀 권리를 박탈당한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봄은 소리 없이 바람을 불러 아이들의 놀 권리를 회복시켜주었다. 페인트를 잔뜩 머금은 나무 시소를 손으로 쓱쓱 문질러 더 이상 손에 페인트가 묻어 나오지 않음을 확인한 어떤 한 선지자는 출입 금지 팻말과 줄을 과감하게 떼어냈다(떼어낸 솜씨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선지자는 12살 미만일 것이라 추정된다.) 소음 없는 놀이터는 이제 없다. 그것을 알아챈 우리 집 꼬맹이 1, 2는 빠른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독한 페인트 냄새가 가시지 않은 놀이 기구는 신이 나지 않는다. 독한 냄새로 코를 맵게 하는 이것이 ‘어린이에게 안전한 친환경 페인트’라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나는 놀이터 한쪽에 있는 모래 놀이터에 앉았다. 그곳에 앉아 두더지에 빙의되어 모래를 파낸다. 그런 어미의 행동이 익숙한 꼬맹이 1, 2는 금세 모사를 시작한다. 마침 수많은 할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향하다 운 좋게 놀이터에 들른 아이들은 신명 나게 모래를 파고 있는 어른 1과 꼬맹이 1, 2를 보았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이끌리듯 아이들 또한 이름 모를 무언가에 이끌려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친구 따라 강남 온 목소리가 유난히 작았던 한 아이는 최소한의 경계를 한다. 모래놀이를 시작한 친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더 작은 목소리로 친구에게 속삭인다. “근데, 저 아줌마 조금 이상해.” 그늘이 드리운 놀이터 벤치에 모여 입시정보, 학원 정보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익숙히 봐왔던 아줌마의 모습이니, 모래놀이를 주도하는 아줌마의 모습은 꽤 수상하고 경계할 만할 일이다. 철옹성 같던 그녀의 경계 태세는 어른 1이 꼬맹이 1, 2의 엄마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무너져 내렸다. 최소한의 경계는 자신의 10여 년 인생 처음 맞은 인지부조화에 대한 예의였을 터. 30분 뒤, 그녀는 어른 1의 총애를 받는 최고의 조수가 되었다. 뗀석기(사실 그냥 뾰족한 돌이다.)를 찾아 칼로 사용하는 구석기인, 이끼를 떼어와 자신의 모래성에 이식하는 생태학자, 나뭇가지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고 꽃과 나뭇잎으로 자신만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예술가, 적당한 때에 이들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발로 걷어내어 패러다임 전환을 제시하는 걸음마를 미처 떼지 못한 계몽가. 그들이 모여 만든 아상블라주!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던 태권도 검은띠를 졸라맨 키가 큰 태권소년은 우리의 놀이가 한심하다는 듯 괜한 딴지를 걸어온다. “이거, 어차피 내일이면 없어져요.”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원래 그래.”

관찰기록

관찰 일시 2023년 4월 21일 오후 4:50~ 6:10 관찰 장소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1365-3 좌표: 북 35.84475˚, 동 127.07527˚
참여자 박성은, 권범준, 권다을 외 초등학생 다수 관찰 목적 어떠한 목적도 갖지않는다.

동네 이상한 아줌마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

  1. 놀이에는 어떠한 규칙도 간섭도 없다.
  2. 어떠한 교육적 의도와 목표를 갖지 않는다.
  3. 갈등 상황 발생 시 개입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지향한다.

그림 1) 주변에 있는 재료를 주워 모으는 모습이다.          2023.04.21. 오후 4:50

그림 1) 주변에 있는 재료를 주워 모으는 모습이다. 2023.04.21. 오후 4:50

그림 ) 이끼를 뜯어내고 개미를 찾은 곳이다. 몇십 마리의 개미들은 모래 놀이터로 이주 되었다.                   2023.04.21. 오후 5:05

그림 ) 이끼를 뜯어내고 개미를 찾은 곳이다. 몇십 마리의 개미들은 모래 놀이터로 이주 되었다. 2023.04.21. 오후 5:05

그림 ) 한 아이는 땅을 파거나 풀을 자르는데 뾰족한 돌을 사용하면 훨씬 수월하다며 돌을 보여주었다.                                                   2023.04.21. 오후 5:08

그림 ) 한 아이는 땅을 파거나 풀을 자르는데 뾰족한 돌을 사용하면 훨씬 수월하다며 돌을 보여주었다. 2023.04.21. 오후 5:08

그림 ) 나뭇가지를 울타리처럼 설치했다. 대부분 나뭇가지를 주워왔지만, 꺾어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23.04.21. 오후 5:20

그림 ) 나뭇가지를 울타리처럼 설치했다. 대부분 나뭇가지를 주워왔지만, 꺾어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23.04.21. 오후 5:20

그림 ) 몇 차례 갈등 상황 후 대규모 협동 작업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짝을 이루어 나뉘어 작업하기 시작했다.                                2023.04.21. 오후5:28

그림 ) 몇 차례 갈등 상황 후 대규모 협동 작업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짝을 이루어 나뉘어 작업하기 시작했다. 2023.04.21. 오후5:28

그림 ) 몇 번의 변형, 보수작업을 거쳐 만들어진 모습. 2023.04.21. 오후 4:50부터 시작된 모래놀이를 6:20까지 참여, 관찰했다. 코를 간지럽히는 꽃가루 분자가 날려 그것이 향기가 됐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봄날, 평범한 모래놀이였다.

그림 ) 몇 번의 변형, 보수작업을 거쳐 만들어진 모습. 2023.04.21. 오후 4:50부터 시작된 모래놀이를 6:20까지 참여, 관찰했다. 코를 간지럽히는 꽃가루 분자가 날려 그것이 향기가 됐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봄날, 평범한 모래놀이였다.